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079 | 작성일 : 2008년 10월 30일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예수님의 여행 목적지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인류구원을 이루어 낼 여행의 최종목적지이다. 그 길을 가시려고 오늘도 내일도 여행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신다.”(루카 13,22) 예수님의 여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여행이 아니다. 고달프고 험난해서 죽음에 직면한 여행이고, 값진 생명을 이루시고자 하는 여행이다.
 히말라야 등정에 나선 산악인들이 정상을 400미터를 눈앞에 두고 눈보라와 눈사태와 직면해서 동상을 입으면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애잔하다 못해 숭고하가까지 하다. 그들이 이렇게 오를 수 있는 것도 죽음을 각오한 여행 뒤에 얻어질 값진 생명 때문일 것이다. 작든 크든 우리에게 여행의 목적이 뚜렷할 때 사람은 강한 신념을 지닌다. 그 신념은 죽음을 뛰어 넘어 값진 생명을 예건하는 신념이다. 예수님의 여행목적은 처절한 고통을 통해 죽음을 뛰어넘는 부활을 이루실 목적이고, 이 목적은 우리에게 값진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 분의 삶 전체를 믿고 희망한다. 고통을 넘어 얻어진 부활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희망의 신학이 된다. 산의 높이가 더할수록 추위와 싸우는 생명은 더욱 강렬하게 빛내고 우리를 일깨운다. 
  내가 존경하는 한 신부님이 있다. 우리가 도청에서 궐기대회를 하던 날에도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였다. 불자인지 신부님인지 아리송한 복장을 하고 나타나셔서 나를 툭 치고는 눈인사를 하고 있었다. 한 손엔 방석이 들려있었는데 아스팔트위에 방석을 놓고는 주저 않으셨다. 아무 말도 않은 채 2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묵상 중이시다. 궐기대회가 끝나자 그 신부님은 다시 방석을 손에 들고 일어나서는 돌아간다며 눈인사를 하고는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깊은 산골마을에 귀농 사목자로 일하시고 있다. 벌써 그곳에서 생활한 지도 실하게 10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처음 그 마을에 들어가던 날 신부님은, 마을 주민에게 “내가 신부요” 하고 인사하니, 주민들이 “니가 신부냐?”하더란다.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하며 몸을 섞고 살아가며 그들의 대변자가 되기도 하고 이장노릇도 해주고, 농촌살림 보태기 위해 도농직거래, 이윤극대화로 그들의 소득을 늘려주자 인심을 사고, 그들이 손수 찾아와서는 “신부님, 신부님!”하고 깍듯이 예를 표하더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신부님이 들려주었다. 이방지역을 혼자 파고 든 신부님은 그 지역복음화를 이루고 그들과 호흡하며 행복하게 오늘을 사신다. 그 분의 여행은 가난한 예수님을 닮았다. 빈 털털이 가난의 삶을 쫒아 죽음을 살며 이룬 시간이 하느님의 생명을 주민들에게 자라게 했던 것이 감동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도청에서 궐기대회가 있던 날, 우리들의 자리에 버팀목이 되어주신 신부님들이 있다. 신선한 신부님들이 로만컬러를 하고 도열하여 기도하신 모습이 신자들을 감동케 했던 모양이었다. “신부님! 신부님들이 많이 오셨네요. 기도하시며 서 계신 모습이 저희에게 큰 힘이 되어주셨어요.”, “수염 기르고 시종일관 앉아게신 도사는 누구신가요. 그분은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 속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셨는지요.” “그분이 도사 신부님이십니다.”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토석채취허가취소’를 위한 1인 시위까지 모두 여섯 차례 궐기대회, 길고 긴 여행길, 목적이 뚜렷했기에 여행도 끝나가려나 보다. 행정심판위원회는 우리 양업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생명이 되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함께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고맙다. 오늘처럼 신나게 춤을 추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