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죽을병이 아니라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125 | 작성일 : 2008년 3월 18일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죽음에서, 부패로 진행되어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생명이 될 수 없는 절망의 나자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나자로야, 이리 나오너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나자로는 곧 무덤에서 살아나온다. 나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절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요한 11,4)라고 말씀하신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고등학교로 갓 입학한 새내기 학생들의 모습은 영 서툴고 어색하다. 장난기 섞인 꾸러기 모습이며, 힘의 우위를 놓고 탐색전을 벌이는 속에 긴장된 표정들이 묻어난다. 철부지들에게 윤리다 도덕이다 하는 불편한 단어보다 오르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우위를 확보하면 그만인 아이들이다. 이는 아이들이 성장하며 커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이다.
학교는 3월의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잔잔한 호수처럼 편안한 느낌도 있고, 가끔 강풍이 이는 느낌도 있다. 뿌연 황사처럼 그들의 마음을 읽지 못해 어른들은 힘들어하기도 한다. 입학 하자마자, 여러 아이들이 한 아이를 놓고 자기들을 비난 했다며 외톨이를 만들었다. 마음이 버거워진 외톨이는 엄마에게 있었던 일을 생중계를 했다. “엄마, 아이들이 나를 따돌렸어, 너무 힘들어” 다수로부터 상처받았을 자녀를 생각했던 엄마는 학교를 신뢰하지 않고 전학을 바랬던 것이다. 입학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는데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도 않고 쉬운 길을 선택하고 단념하겠다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황당함을 느낀다.
나는 부모의 결정을 놓고 “그렇게 하라.”고 존중하듯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자 책임은 아니다. 내가 애써 설득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전달 되 오는 느낌은 자기 자녀를 두둔하고 동료 아이들만 탓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사실 학생의 결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의 말만 듣고 쉽게 전학을 결정한 부모를 나무라고 싶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다. “애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참아보렴.” 라고 말해주아야 했다. 자녀가 피할 만큼 견디기 어려운 상황도 때론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동체와 부딪치며 살아가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자녀가 어려움을 견디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 사이에 적응을 해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성숙한 자신을 보게 될 텐데 말이다. 이 결과는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도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부모는 일정량 모른 척하며 지낼 필요가 있다. 성장통을 겪은 자녀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때면 비로소 아 과연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이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신앙인들이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것처럼, 자녀를 학교에 맡긴 부모라면 ‘사랑의 학교’를 신뢰하며 견디어 내며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살아갈 때 자녀도, 부모도 다 함께 생명의 부활을 노래할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들 문제에 있어서 더욱 성숙한 판단을 바란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랑한답시고 자녀가 안쓰럽다는 이유로 학교 밖으로 꺼내가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절망에 선 사람에게 “나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생명이 되어주신 구세주 예수님처럼 나도 그들 부모와 자녀를 향하여 열린 세상으로 더 당당하게 불러내오고 싶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그들 모두에게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과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죽음에서, 부패로 진행되어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생명이 될 수 없는 절망의 나자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나자로야, 이리 나오너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나자로는 곧 무덤에서 살아나온다. 나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절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요한 11,4)라고 말씀하신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고등학교로 갓 입학한 새내기 학생들의 모습은 영 서툴고 어색하다. 장난기 섞인 꾸러기 모습이며, 힘의 우위를 놓고 탐색전을 벌이는 속에 긴장된 표정들이 묻어난다. 철부지들에게 윤리다 도덕이다 하는 불편한 단어보다 오르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우위를 확보하면 그만인 아이들이다. 이는 아이들이 성장하며 커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이다.
학교는 3월의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잔잔한 호수처럼 편안한 느낌도 있고, 가끔 강풍이 이는 느낌도 있다. 뿌연 황사처럼 그들의 마음을 읽지 못해 어른들은 힘들어하기도 한다. 입학 하자마자, 여러 아이들이 한 아이를 놓고 자기들을 비난 했다며 외톨이를 만들었다. 마음이 버거워진 외톨이는 엄마에게 있었던 일을 생중계를 했다. “엄마, 아이들이 나를 따돌렸어, 너무 힘들어” 다수로부터 상처받았을 자녀를 생각했던 엄마는 학교를 신뢰하지 않고 전학을 바랬던 것이다. 입학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는데 제대로 한번 살아보지도 않고 쉬운 길을 선택하고 단념하겠다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황당함을 느낀다.
나는 부모의 결정을 놓고 “그렇게 하라.”고 존중하듯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자 책임은 아니다. 내가 애써 설득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전달 되 오는 느낌은 자기 자녀를 두둔하고 동료 아이들만 탓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사실 학생의 결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의 말만 듣고 쉽게 전학을 결정한 부모를 나무라고 싶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다. “애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참아보렴.” 라고 말해주아야 했다. 자녀가 피할 만큼 견디기 어려운 상황도 때론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동체와 부딪치며 살아가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자녀가 어려움을 견디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 사이에 적응을 해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성숙한 자신을 보게 될 텐데 말이다. 이 결과는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도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부모는 일정량 모른 척하며 지낼 필요가 있다. 성장통을 겪은 자녀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때면 비로소 아 과연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이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신앙인들이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것처럼, 자녀를 학교에 맡긴 부모라면 ‘사랑의 학교’를 신뢰하며 견디어 내며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살아갈 때 자녀도, 부모도 다 함께 생명의 부활을 노래할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들 문제에 있어서 더욱 성숙한 판단을 바란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랑한답시고 자녀가 안쓰럽다는 이유로 학교 밖으로 꺼내가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절망에 선 사람에게 “나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생명이 되어주신 구세주 예수님처럼 나도 그들 부모와 자녀를 향하여 열린 세상으로 더 당당하게 불러내오고 싶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그들 모두에게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과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