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가지 참고 견디면..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237 | 작성일 : 2008년 7월 16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이는 구원을(마태,10.22)
생명이 자라나려면 성장 통을 겪는다. 하나의 생명체가 열매를 충실히 맺는 것도,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한 기쁨과 행복을 만드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 구원을 위하여 자신은 살아가기 위한 삶의 투쟁에서 건실한 뿌리를 내려야 하고, 잎을 피워 내야하고, 끊임없이 영양을 섭취하며, 자연과 도전하며 성장을 계속해야 한다. 생명은 여름의 불볕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야한다. 조건 없이 주어진 여건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생명은 성장을 계속해 간다. 생명은 구원을 이룰 때까지 묵묵히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살아갈 때 구원을 얻게 된다.
인간은 식. 동물과는 전혀 다르다. 주어진 여건이 힘들다 싶으면 약삭빠르게 피할 수도 있으며, 때론 고통스럽지만 철저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요령을 부릴 수도 있고, 순수하게 그 조건을 불평 없이 끌어안고 살아 갈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구원의 질이 달라진다.
즐기기를 좋아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좋게만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누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모두 일생을 놀고먹는 것으로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길 선택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구원은 그렇게 살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그루의 나무가 심겨지면 뿌리를 내려야하는 것도, 영양분을 찾아 움직이는 것도 자연과 맞서며 당당하게 서 있는 것도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건강한 생명을 간직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한 생명을 간직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구원은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이 구원을 위해 정도를 걷는 것, 이것이 순교하는 것이고, 죽는 것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어느 사이에 내 자신을 죽이기가 너무 힘들어 하느님을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매일의 삶 안에서 어려운 것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사는 것, 하느님의 뜻을 위해 내 자신을 버리는 것, 이 삶이 순교라고 할 때, 이 죽음의 연속적인 실천은 결정적인 순교를 이루어 내지 않겠는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국의 첫 사제, 그의 나이 16세에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구원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마카오까지의 고통의 연속 행군, 10년간의 수학, 철학과 신학공부, 그의 삶은 박해의 연속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만들어 가야했기에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순교의 삶 그 자체였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구원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 지는 작품이 아니다. 일생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정도를 걸어 갈 때만이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성인께서는 매일의 삶속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선택했겠는가? 그분의 순교는 결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님을, 매일 매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삶의 결정체인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성인이시여! 한국 교회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시고 매번 죽음의 삶을 선택하는 사제가 되게 빌어주소서.
생명이 자라나려면 성장 통을 겪는다. 하나의 생명체가 열매를 충실히 맺는 것도,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한 기쁨과 행복을 만드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 구원을 위하여 자신은 살아가기 위한 삶의 투쟁에서 건실한 뿌리를 내려야 하고, 잎을 피워 내야하고, 끊임없이 영양을 섭취하며, 자연과 도전하며 성장을 계속해야 한다. 생명은 여름의 불볕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야한다. 조건 없이 주어진 여건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생명은 성장을 계속해 간다. 생명은 구원을 이룰 때까지 묵묵히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살아갈 때 구원을 얻게 된다.
인간은 식. 동물과는 전혀 다르다. 주어진 여건이 힘들다 싶으면 약삭빠르게 피할 수도 있으며, 때론 고통스럽지만 철저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요령을 부릴 수도 있고, 순수하게 그 조건을 불평 없이 끌어안고 살아 갈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구원의 질이 달라진다.
즐기기를 좋아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좋게만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누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모두 일생을 놀고먹는 것으로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길 선택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구원은 그렇게 살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그루의 나무가 심겨지면 뿌리를 내려야하는 것도, 영양분을 찾아 움직이는 것도 자연과 맞서며 당당하게 서 있는 것도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건강한 생명을 간직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한 생명을 간직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구원은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이 구원을 위해 정도를 걷는 것, 이것이 순교하는 것이고, 죽는 것이 아닐까.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어느 사이에 내 자신을 죽이기가 너무 힘들어 하느님을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매일의 삶 안에서 어려운 것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사는 것, 하느님의 뜻을 위해 내 자신을 버리는 것, 이 삶이 순교라고 할 때, 이 죽음의 연속적인 실천은 결정적인 순교를 이루어 내지 않겠는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국의 첫 사제, 그의 나이 16세에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구원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마카오까지의 고통의 연속 행군, 10년간의 수학, 철학과 신학공부, 그의 삶은 박해의 연속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만들어 가야했기에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순교의 삶 그 자체였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구원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 지는 작품이 아니다. 일생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정도를 걸어 갈 때만이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성인께서는 매일의 삶속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선택했겠는가? 그분의 순교는 결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님을, 매일 매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삶의 결정체인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성인이시여! 한국 교회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시고 매번 죽음의 삶을 선택하는 사제가 되게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