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아” 대신 “청소년 문제”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481 | 작성일 : 2006년 3월 27일

<FONT face=돋움체 size=2>&nbsp;</FONT><A name="[문서의 처음]"></A>
<P style="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FONT face=돋움체>&nbsp;&nbsp;어른들이 때로는 참 비겁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문제아’란 단어는 청소년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만든 단어이다. 어른들은 문제를 지닌 청소년들을 제대로 바라다보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큰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방치하고는 무책임한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이 표현은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마치 아이들 혼자만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떠넘기는 것 같아 비겁하다는 생각이다. 어른들은 지금부터라도 ‘문제아’라는 표현 대신에 책임의 연대성을 갖는 ‘청소년 문제’라고 표현을 썼으면 좋겠다. ‘청소년 문제’라고 표현하면 듣는 입장에서의 느낌이 그래도 조금은 편안해질 것이다. ‘청소년 문제’라고 하면 청소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이기는 하나 그 책임이 전적으로 청소년에게 있는 것보다는 어른들도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연대하여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좋다. “문제아”라고 하면 거기에는 이미 구제불능의 낙인이 찍혀있다. 이미 성인이 된 어른들이 한창 변화를 추구하며 희망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불도장을 찍어 불량으로 몰아붙여야 하겠는가?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 속에는 양질도 있고 불량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공부가 싫어서, 등교를 거부한다고 해서, 대인 기피증이라고 해서, 학교를 어떤 문제로 중퇴했다고 해서 그들을 아무 생각 없이 ‘문제아’라고 낙인찍는다면 어른의 도리가 아니다. 사춘기의 청소년 문제는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청소년들에 대한 어른으로의 책임을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된다. 어른으로서 묘안을 찾아서 그들을 기어코 살려내야 한다. 플라톤은 현실세계는 허상이며 이데아의 세계를 참된 세계로 보았다. 인간이 현실에서 이데아의 세계에 오르기 위해서는 인간 내면에 사랑의 힘이 필수적이라고 하며, 그 힘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참된 세계로 상승할 수 있는 동인인 에로스를 지닐 때만이 인간으로서 참된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청소년들에게 진리의 세계로 접근해 가도록 동인을 갖게 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숙한 어른들의 몫이기도 하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지극하신 사랑이 방탕한 작은 아들을 참된 삶으로 향하는 동인을 갖게 했다면, 우리 어른들을 보고 ‘청소년 문제’가 보다 더 좋은 쪽으로 향활 수 있도록 동인을 불어 넣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청소년들을 낙인찍는 “문제아”라는 표현 대신 “청소년 문제”로 표현하며 그 책임의 연대성을 지니고 걸어갔으면 좋겠다.</FONT> </SPA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