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부와의 식사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980 | 작성일 : 2007년 9월 27일

서울에서 회합이 끝나면 지인과 함께 식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분은 어김없이 나타나 나를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언제 적 차인지 승용차는 완전 똥차였다. 나는 차에 오르면서 “와,너무 헐었다.”하자, “신부님, 이래 뵈도 엔진은 아직도 멀쩡합니다.” 라며 평소대로 싱글벙글하면서 운전을 했다. 후에 그의 아들한테 알아냈는데, 그 차는 똥차가 아니라 골동품 명차처럼 정이 담겨진 차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손님으로 북적이는 식당에서 특별정식을 주문해 주었다.나는 그가 늘 갑부라는 인상 때문에 식사자리가 불편하지 않았었다. 언제나 구김살 없이 웃는 편안 얼굴이 풍성하다는 느낌이었기에 부담 없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빗나갔다. 식사 중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매우 복잡하게 일이 꼬인 상황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자리가 송곳에 앉은 듯 불편해졌다.   
 나의 표정을 읽은 그는 오히려 이야기를 주춤거리지 않고 가속도가 붙였다.“아들은 친구에게 왕따와 폭력으로 학교 생활에 부적응했고, 저의 급한 성격은 부자관계를 망가트렸으며, 저의 실직으로 인해 가정경제는 곤두박질하고 저는 설 자리를 잃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을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으니 이를 표리부동이라고나 할까? 아차 싶어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는, “신부님, 오늘 식사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하였다.
 “아들이 고1때 부적응하고 아이가 학원폭력에 시달렸을 때, 제 아이는 자퇴를 졸랐고 저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학교를 원망하고 아들을 꺼내오고 싶었지만, 아내의 만류로 감정을 다스렸습니다. 실직한 저와 아이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직장도 없는 내 자신의 자격지심에 미성숙한 아이에게 성질을 부릴 때면, 아이는 더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집 안이 콩가루가 되어가고 있을 때, 부자지간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제 아내는 성당에서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아들이 자퇴의 위기를 넘고, 고2가 되었을 때는 비료를 신발에 넣고 다녔는지 무려 10센티미터가 넘게 성장하였고, 부적응한 마음도 성장을 했습니다. 철이든 아들이 힘들어 하는 제게 와서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며,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지요?” 하는 말을 들려줄 때 저는 감격했습니다. 경제가 추락하여 집을 정리하고 작은 집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기꺼이 이사를 가야지요!” 라고 한 아들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실직한 아버지는 아들이 건강하게 서고, 실하게 생겨 먹은 직장까지 구했다며 싱글벙글이다. 실직으로 가정에서 서 있기조차 힘들어 하던 아버지에게도 또 다른 대박이 터진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부적응했던 아들과 나를 지지해준 아내 덕분이라며 아내에게 공을 돌렸다. 게다가 아들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준 학교에도 감사하고 있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듯한 불편한 식사는 갑자기 ‘갑부의 식사’로 변해 있었다. 이 학교에 지원하겠다는 둘째도 이 학교에 꼭 다녀야 한다고 그 집안 떼거리가 성화이다. 고3 아들은 “신부님, 우리 집은 천국입니다. 일학년 때 나를 괴롭혔던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성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학교에 남아 있는 덕분에 이렇게 훌륭히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 기회를 놓쳤다면 우리 집은 콩가루가 되었겠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라는 말씀처럼 고통 속에 행복을 건진 사람들과의 식사는 그 어느 갑부와의 식사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