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같은 일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438 | 작성일 : 2005년 6월 3일
소는 파란 풀밭에서 양질의 풀을 뜯고 지내는 초식동물이다. 평원에서 풀을 뜯고 되새김질하는 소를 보면 왠지 여유롭고 평화스럽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소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넘어지는 증세가 나타났다. 21세기를 열면서 광우병의 유령이 유럽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를 강타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모두가 경악했다. 사람에게 맛좋고 건강한 육질을 제공할 소가 발작을 일으켰으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생산농가도 큰 타격이지만, 먹거리가 위협당하고 있으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원인은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질 사료를 먹인 결과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자연적인 방법을 역행하여 인위적인 방법으로 기발한 발상이 빚어낸 대작이었다. 어떻게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줄 생각을 했을까? 그 동안 전문가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연의 순리를 인위적으로 바꿔가며 경제적으로 이익을 챙기겠다는 착안에서였을 것이다. 요즘 웰빙(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란 말이 귀에 익는다. 여기에는 자연에 가까운 먹거리를 식단에 올리겠다는 의지도 이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런데 자연에 역행하는 대상이 어디 광우병이 걸린 소뿐이겠는가? 계절이 무색한 채소, 언제나 대할 수 있는 열매채소들, 참외, 딸기, 수박 등 하우스 속에서 강제로 불을 지펴 조건을 맞춰 자연에서 자란 것보다 훨씬 더 미각을 돋우는 채소들이 사시사철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런 인위적인 재배방법으로 과연 인간에게 안전하고 신선한 열매채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위험요소들이 숨어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경악케 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웰빙을 외쳐대며 자연의 순리로 돌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은 이 말이 생소하고 사치스럽지만 철따라 익는 열매채소들이 기다려지는 것은 단순한 향수일까? 하느님께서는 봄철 꽃이 만발하도록 배려하셨고, 여름은 싱싱함을, 가을은 생명의 완숙함을 이루어주시며, 우리 인간 생명이 성장과 발전을 충분히 하도록 배려를 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인위적인 조작만을 일삼는다. 학교 앞 마당에 잔디밭이 너무나 싱그럽다. 양탄자처럼 푹신한 파란 잔디밭에서 담소를 할 때면 하느님께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색깔을 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배려하심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을 했다. 개나리가 혹 여름쯤 만개하여 초여름을 노란색으로 무덥게 물들인다면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처럼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이다. 현대과학자들은 자연적인 것을 거슬러 인위적으로 위대해 보이는 작품을 기대할는지 모르지만 먼 훗날 기형적인 결과에 독을 맛보며 신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느님을 모르는 똑똑한 인간이 많은 경우 오류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말 것이다. 교육도 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고 너무 일방적으로 급조된 방법들이 광우병처럼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건강한 바탕도 마련하지 않고 실용인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초식동물에 동물성 먹이를 주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만 한다. 인간생명이 무성하게 자랐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급조된 방법으로 생명 가꾸기를 하는 것을 보며 과연 미래는 희망적인가 자문하곤 한다. 인간들이 덜 똑똑하면서 하느님을 신뢰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똑똑한 인간들의 인위적 내용이 신문을 메운다.
자연적인 방법을 역행하여 인위적인 방법으로 기발한 발상이 빚어낸 대작이었다. 어떻게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줄 생각을 했을까? 그 동안 전문가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연의 순리를 인위적으로 바꿔가며 경제적으로 이익을 챙기겠다는 착안에서였을 것이다. 요즘 웰빙(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란 말이 귀에 익는다. 여기에는 자연에 가까운 먹거리를 식단에 올리겠다는 의지도 이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런데 자연에 역행하는 대상이 어디 광우병이 걸린 소뿐이겠는가? 계절이 무색한 채소, 언제나 대할 수 있는 열매채소들, 참외, 딸기, 수박 등 하우스 속에서 강제로 불을 지펴 조건을 맞춰 자연에서 자란 것보다 훨씬 더 미각을 돋우는 채소들이 사시사철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런 인위적인 재배방법으로 과연 인간에게 안전하고 신선한 열매채소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위험요소들이 숨어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경악케 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웰빙을 외쳐대며 자연의 순리로 돌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은 이 말이 생소하고 사치스럽지만 철따라 익는 열매채소들이 기다려지는 것은 단순한 향수일까? 하느님께서는 봄철 꽃이 만발하도록 배려하셨고, 여름은 싱싱함을, 가을은 생명의 완숙함을 이루어주시며, 우리 인간 생명이 성장과 발전을 충분히 하도록 배려를 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인위적인 조작만을 일삼는다. 학교 앞 마당에 잔디밭이 너무나 싱그럽다. 양탄자처럼 푹신한 파란 잔디밭에서 담소를 할 때면 하느님께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색깔을 보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배려하심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을 했다. 개나리가 혹 여름쯤 만개하여 초여름을 노란색으로 무덥게 물들인다면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처럼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릴 것이다. 현대과학자들은 자연적인 것을 거슬러 인위적으로 위대해 보이는 작품을 기대할는지 모르지만 먼 훗날 기형적인 결과에 독을 맛보며 신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느님을 모르는 똑똑한 인간이 많은 경우 오류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말 것이다. 교육도 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고 너무 일방적으로 급조된 방법들이 광우병처럼 인간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건강한 바탕도 마련하지 않고 실용인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초식동물에 동물성 먹이를 주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만 한다. 인간생명이 무성하게 자랐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급조된 방법으로 생명 가꾸기를 하는 것을 보며 과연 미래는 희망적인가 자문하곤 한다. 인간들이 덜 똑똑하면서 하느님을 신뢰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똑똑한 인간들의 인위적 내용이 신문을 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