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에 대하여(교사 김진숙)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584 | 작성일 : 2005년 3월 25일

얼마 전 한 장애인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봉사활동을 하러 온 대학생과 잠깐 얘기를 하였는데, 대안학교에 근무한다고 소개를 하니까 대안학교가 뭐냐고 물었다. 그간 교육에 대한 문제점들이 많이 논의되었고 학교붕괴니 교실붕괴니 하는 말들은 이제 옛말이 될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실험하는 교육 현장인 대안학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곳에 오래 몸담고 있던 나로서는 난감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 몸담은 지 벌써 7년째. 그 동안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바깥에서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시선과는 달리 특별한 아이들이 아니다. 같은 연령대의 고등학생들처럼 여리고 순수하고 상처받기 쉬운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그런 평범한 아이들을 누가, 무엇이 그토록 평범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내가 만난 아이들은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음악, 미술, 문학, 체육, 외국어 능력 등등... 아이들은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을 서투르고 직선적으로나마 표현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처에 짓눌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서는 교사와의 관계가 깨졌거나 동료관계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고 또는 가정적으로 이혼한 가정의 자녀가 많았다. 적어도 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와의 관계가 왜곡되고 훼손된 경우 역시 많았다. 관계가 어긋났다, 라는 말은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말이 결코 아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사랑이 충만한 관계가 되지 못하고 부모의 부족한 면인 이기심, 편협함, 편애, 익애(溺愛) 등으로 자녀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으며 왜곡된 가치관을 흡수하며 자란다. 이런 아이들을 학교에서 또한 수용해주지 못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세상과 자신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욕을 차단당한 채 오직 대학입시만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 현실. 신나게 몸을 움직이고 새로운 경험들에 무한히 열려있고 싶은 마음의 아이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어지는 건 오로지 무표정하고 딱딱한 책과 노트뿐이다. 이런 교육환경에서 우리 청소년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옆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봄에 피어나는 연초록 새순의 싱그러움을 느끼며, 내리는 빗줄기에 잠시 손을 놓고 감상할 줄 알며, 소외된 사람의 손을 자신의 이웃처럼 스스럼없이 잡아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새롭게 감지되기 시작하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과 욕구를 모두 학교에서 충분히 채워줄 수 있을까. 공교육에서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이탈한 학생이 매년 10만 명을 넘고 있다. 다른 아이들보다 부모의 관심과 지원을 많이 받아 실험적 성격을 지닌 대안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체 이탈학생의 비율 중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고 대다수는 사회의 노동현장이나 범죄현장에 대책 없이 노출되고 만다. 상처를 받고 대안학교에 처음 입학한 학생들은 옆에 있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거칠고 어둡고 투박하다. 교사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아이들에게 달려들고 종교, 봉사활동, 산악등반, 현장체험학습, 가족관계, 청소년성장프로그램 등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아이들은 자기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다양한 개성을 가진 또래 친구들과 부딪치며, 태어날 때부터 손과 발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며, 장엄한 민족의 정기를 품은 지리산을 종주하며, 중국 연변의 감자농장에서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보낼 감자를 캐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고, 자신의 껍질을 깨며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할 줄 알게 되며 재능과 관심 분야를 찾아 매진한다. 90년대 후반, 대안학교가 정식교육기관으로 인가받을 즈음 부적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라는 인식과 달리 요즘은 순수하게 공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교육방식과 내용을 시도하는 곳으로서의 대안교육을 찾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변화해 가는 ‘대안’의 참다운 의미를 지속적으로 모색해나가야겠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가 여린 풀잎 같은 혹은 거친 파도 같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