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신비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658 | 작성일 : 2004년 11월 15일
고통 속에 기쁨과 행복이란 선물이 들어 있음을 깨닫는 것은 그 상황을 헤쳐나간 후의 일이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고통을 직면하여 살려 하지 않는다. 전후좌우도 없고 오직 자기의 발등에 불만 보고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세상을 쉽게 살아간 사람들이 진지하게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보다 지나 온 날들을 더 답답해하고 허전해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과 그에 따른 즐거움만 약삭빠르게 추구해온 결과가 아닐까. 지난 시간에 대해 답답하고 허전한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 대부분은 평소에 고통에 직면하며 진지하게 살려는 의지가 부족했던 사람들인 것 같다. 고통을 통한 자기 성숙을 피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은데서 오는 인생의 실망감일 것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은 그 방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뿐 아니라 남에게도 상처를 주어, 결국 서로에게 생명이 되지 못했다는 초라한 자괴감을 안고 후회를 하게 되는데 이미 때늦음을 느낄 뿐이다.
신앙의 본질에 접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고통과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고 난 후 부활이라는 생명을 보면서, 내 안에도, 이웃에게도 부활의 생명을 이루는 노력이 아닐까. 고통을 직면하며 남을 배려하는 속에서 기쁨을 끌어내며, 그에 더하여 남의 상처도 싸매줄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삶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바탕으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적 삶은 하느님을 향하여 살며 자신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해 있고, 그 노력은 나, 너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풍부한 생명력으로 인도함이다. 현세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분들은 자기가 직면하는 아픔뿐 아니라, 남이 나에게 준 아픔까지도 품어 안는다. 그들은 힘이 들지만 고통을 끌어안으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 다 사는, 보다 성숙한 삶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는 고통을 끌어안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경우 똑똑하다는 사람들 안에서는 거의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한다. 하느님 앞에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와 신앙적 삶을 살았던 자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非신앙인과 성숙치 못한 신앙인들까지도 성인 성녀의 삶과 순교자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에 대한 어리석은 세뇌라며 단정하지만, 진정한 신앙인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삶 안에서 고통을 통한 기쁨과 행복이라는 부활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신앙인들 경우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며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다시 살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본다. 왜 사람들은 자기 목숨만 보게 되는지, 참고 기다려주는 마음은 왜 없는지, 남이 나에게 지워준 고통일지라도 끌어안고 생명을 만들 수는 없는지. 때론 손해를 보면서 살 수는 없는지. 적어도 신앙인들은 신앙의 본질에 접근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삶을 드려다 보면 천국에 이르는 문은 역시 ‘좁은 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배운 것은 부족했지만 삶은 숭고했는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배운 것이 많으면서도 늘 남에게 옹색해서 우를 범하며 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다행스럽게 우리들 속에서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시는 넉넉하고 훈훈한 분들을 만날 때면 우리 모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큰 기쁨과 위안으로 돌아온다. 그런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다.
신앙의 본질에 접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고통과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고 난 후 부활이라는 생명을 보면서, 내 안에도, 이웃에게도 부활의 생명을 이루는 노력이 아닐까. 고통을 직면하며 남을 배려하는 속에서 기쁨을 끌어내며, 그에 더하여 남의 상처도 싸매줄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삶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바탕으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적 삶은 하느님을 향하여 살며 자신 뿐 아니라 이웃을 향해 있고, 그 노력은 나, 너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풍부한 생명력으로 인도함이다. 현세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는 분들은 자기가 직면하는 아픔뿐 아니라, 남이 나에게 준 아픔까지도 품어 안는다. 그들은 힘이 들지만 고통을 끌어안으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 다 사는, 보다 성숙한 삶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는 고통을 끌어안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경우 똑똑하다는 사람들 안에서는 거의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망한다. 하느님 앞에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와 신앙적 삶을 살았던 자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非신앙인과 성숙치 못한 신앙인들까지도 성인 성녀의 삶과 순교자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에 대한 어리석은 세뇌라며 단정하지만, 진정한 신앙인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삶 안에서 고통을 통한 기쁨과 행복이라는 부활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신앙인들 경우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며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다시 살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본다. 왜 사람들은 자기 목숨만 보게 되는지, 참고 기다려주는 마음은 왜 없는지, 남이 나에게 지워준 고통일지라도 끌어안고 생명을 만들 수는 없는지. 때론 손해를 보면서 살 수는 없는지. 적어도 신앙인들은 신앙의 본질에 접근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삶을 드려다 보면 천국에 이르는 문은 역시 ‘좁은 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배운 것은 부족했지만 삶은 숭고했는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배운 것이 많으면서도 늘 남에게 옹색해서 우를 범하며 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다행스럽게 우리들 속에서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시는 넉넉하고 훈훈한 분들을 만날 때면 우리 모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큰 기쁨과 위안으로 돌아온다. 그런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