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葛藤)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604 | 작성일 : 2005년 9월 8일
청소년 이야기를 하다가 갈등에 대한 말이 나왔다. “신부님! 갈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칡과 등나무의 합성어입니다.” 수도원 공식방문을 하고 있는 관구장 수녀님이 알려주었다. 정말 칡 갈(葛), 등나무 등(藤)을 떠 올리며 주변의 나무들을 귀찮게 하는 실재모습을 보면서 갈등이란 단어를 실감케 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살아가면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인간 모두가 그 갈등을 빨리 벗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갈등은 고통이지만 필수적이다. 적당히 갈등하면 좋으련만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갈등하는 부분도 있다. 그런 경우 내가 노력하여 벗어던지든지 남의 도움으로 벗어지든지 하여 홀가분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길 바란다.
조석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이 나의 일과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산책을 하다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칡넝쿨이, 등나무가 감고 있는 나무를 보면 내 자신의 온 몸을 휘감고, 등짝을 짓누르듯 답답해서 쳐다보기조차 싫어질 때가 있다. 콩과식물이라서 얼마나 번식력이 뛰어난지 주인에게 달라붙은 넝쿨을 사정없이 베어버리지만, 돌아서면 그 자생력이 뛰어나서 여전히 그 주변을 덮어버리곤 한다. 산 하나를 다 덮어버리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낫을 들고 덤벼들지만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
등나무는 또 어떨까? 감고 올라가는 방향도 왼쪽으로 틀고 오르기에 재수가 없다고 집안에 심지 않는 나무이다. 운동장 주변에 산을 삼켜버릴 듯 자라는 등나무는 얼마나 번식력이 뛰어난지 무섭기까지 하다. 다행이도 칡과 등나무가 함께 엉켜 자라나는 모습은 주변에서 아직은 볼 수 없는데 만일 그 두 놈이 함께 감고 싸움질이라도 한다면 정말 볼만할 것이다.
“갈등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을 삼키는 칡넝쿨과 등나무로 인해 결국은 건강한 나무들이 고목이 되어 죽어간 모습을 보면 이 말을 함부로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갈등, 그 무엇이 그들의 정신과 육신을 챙챙 감고 올라가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 원인을 제거해 주고 싶다. 지식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고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 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식은 인간의 인간됨을 만드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기에 알고 있는 지식은 일회적이어서 쓰고 나면 헌신짝처럼 버린다. 너무나 분주하게 움직여 자기를 돌아볼 시간조차 없는 사회, 실속이 없다. 가정에도 삶을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 현장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교회마저도 삶의 이야기가 점점 적어진다. 삶 속에서 지식을 꺼내고 지혜를 사랑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쓰레기 버리듯 살고 있으면서 남 탓만 한다. 가정은 학교를, 학교는 가정을 탓한다. 요즘은 부모나 교사가 제 몫을 못하니 종교인들을 몰아세우며 삶이 없는 교회를 만들고 있다고 사목자를 야단친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진다. 갈등이 있는데도 그것을 해결해줄 대책을 선뜻 내세우지 못한다. 생명이 되는 대책이 있을 때만이 갈등은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범생이 어른들은 갈등하는 청소년들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제대로 읽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 인간 모두는 살아가면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인간 모두가 그 갈등을 빨리 벗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갈등은 고통이지만 필수적이다. 적당히 갈등하면 좋으련만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갈등하는 부분도 있다. 그런 경우 내가 노력하여 벗어던지든지 남의 도움으로 벗어지든지 하여 홀가분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살아가길 바란다.
조석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이 나의 일과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산책을 하다보면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칡넝쿨이, 등나무가 감고 있는 나무를 보면 내 자신의 온 몸을 휘감고, 등짝을 짓누르듯 답답해서 쳐다보기조차 싫어질 때가 있다. 콩과식물이라서 얼마나 번식력이 뛰어난지 주인에게 달라붙은 넝쿨을 사정없이 베어버리지만, 돌아서면 그 자생력이 뛰어나서 여전히 그 주변을 덮어버리곤 한다. 산 하나를 다 덮어버리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낫을 들고 덤벼들지만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
등나무는 또 어떨까? 감고 올라가는 방향도 왼쪽으로 틀고 오르기에 재수가 없다고 집안에 심지 않는 나무이다. 운동장 주변에 산을 삼켜버릴 듯 자라는 등나무는 얼마나 번식력이 뛰어난지 무섭기까지 하다. 다행이도 칡과 등나무가 함께 엉켜 자라나는 모습은 주변에서 아직은 볼 수 없는데 만일 그 두 놈이 함께 감고 싸움질이라도 한다면 정말 볼만할 것이다.
“갈등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을 삼키는 칡넝쿨과 등나무로 인해 결국은 건강한 나무들이 고목이 되어 죽어간 모습을 보면 이 말을 함부로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갈등, 그 무엇이 그들의 정신과 육신을 챙챙 감고 올라가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 원인을 제거해 주고 싶다. 지식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고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 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식은 인간의 인간됨을 만드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기에 알고 있는 지식은 일회적이어서 쓰고 나면 헌신짝처럼 버린다. 너무나 분주하게 움직여 자기를 돌아볼 시간조차 없는 사회, 실속이 없다. 가정에도 삶을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 현장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교회마저도 삶의 이야기가 점점 적어진다. 삶 속에서 지식을 꺼내고 지혜를 사랑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쓰레기 버리듯 살고 있으면서 남 탓만 한다. 가정은 학교를, 학교는 가정을 탓한다. 요즘은 부모나 교사가 제 몫을 못하니 종교인들을 몰아세우며 삶이 없는 교회를 만들고 있다고 사목자를 야단친다.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답답해진다. 갈등이 있는데도 그것을 해결해줄 대책을 선뜻 내세우지 못한다. 생명이 되는 대책이 있을 때만이 갈등은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범생이 어른들은 갈등하는 청소년들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제대로 읽고 대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