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 수녀님 25주년에 부쳐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522 | 작성일 : 2005년 2월 7일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다. 누구와 이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했었다. 양업고등학교의 설립을 세상에 공개하면서 성 요한 보스꼬의 영성을 살고 있는 수도원에서 제일 먼저 손짓을 해 오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개학이 다 될 때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직자, 수도자들이 교사로 구성되어 학생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수녀회에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97년 겨울 교사동 신축을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할 때, 인천의 노틀담 수녀회에서 4명의 수도자들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땅을 파는 현장에 나타나서는 내 속에만 그려져 있는 청사진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은 그럴싸했지만 과연 수녀회의 결정으로 이어질 것인가를 긴장 속에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인천 박문여중.고의 3명의 수녀들을 파견하겠다는 결정이 왔다. 학교설립을 확정지었지만 황무지 같은 땅에 서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이 때 함께 일할 동업자가 생겨났다는 것은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교가 되기 전 수사들과 수녀들은 선함 마음으로 설립을 다져나갔다. 주인으로서 손님을 초대해 놓았지만 머물 집도, 그릇도, 숟가락도, 비집고 앉을 자리 없던 시절, 참 모든 것이 어설프기만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와 너의 구성원들이 관계성과 친밀성도 없던 시절, 뜻을 모아 살아간다는 것과 엄청난 청소년들을 보듬고 살아간다는 것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육철학의 바탕도 없이 모두가 불모지에서 시작하였다. 일 년이 지나고 수사들과 수녀들이 못 살겠다고 모두 떠나갔다. 한 수녀만 남겨놓은 채... 그 수녀가 지금의 교감 수녀가 된 것이다. 일반 교사들이 그 자리를 채우며 전환기를 맞이하였고 학교 공동체의 모습도 변화를 가져왔다. 소신 지원을 했다고 장담하던 교사들이었지만 학생들의 관계가 아닌, 교사들의 관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이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런 속에서 교사들의 중심에서 흔들림 없이 서있던 분이 바로 지금의 교감 수녀(조현순 마가리타)이다.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가난하고 청아한 모습의 수도자로 이곳에 와서 지금은 반백이 되어 대안학교의 마인드를 갖고 당당히 서서 교육을 말하고 있다. 학교가 설립된다는 소식이 공중파를 탔을 때, 일반학교에서 정상을 달리던 수도자가 새로운 교육의 장에서 몸소 십자가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수도회 장상에게 수녀회 파견을 건의했다는 것도 후에 알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 일은 사명감과 투신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거쳐 간 수도자들은 꿈은 야무졌지만 살다가 힘에 부치니 도망치듯 떠나갔다. 나에게는 설립을 하고 즐겁고 기쁘고 신나는 일도 많았지만 그림자처럼 살았던 수녀에게는 아무런 칭찬도 보상도 없이, 때로는 잘못의 화살이 그를 향해 튀어가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는 단지 겸손한 수도자로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며 예수님의 사랑을 향한 열정과 항구심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하며 세상 한구석에 쳐 박혀 살아가는 모습이 전부일 뿐이다. 2005년 2월2일, 은경축 미사 중에 수녀는 “나를 수도자로서 살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정작 하느님 앞에 내보일 게 없는 수도자입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을 사랑스러워하며 그 열정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업무적으로 교장과 교사들 간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것도 벅찬데, 넉넉지 못한 학교 살림에 학생들에게 마련할 간식 걱정으로 쉴 틈도 없다. 언제나 잔잔한 미소에 야단 한번 치지 않는 수도자의 덕이 함께 지내는 나를 부럽고 든든하게 만들어준다. 수녀님이 양업에 있는 동안 양업은 더욱 건강해 가리라 믿는다. 봉헌의 삶, 25주년을 축하드리며 또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며 양업 공동체 가족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