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자고 있느냐?(마태26,45)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360 | 작성일 : 2005년 5월 14일

신부님 강론 중에 신자들 대부분이 졸고 있고 할머니만 초롱초롱 눈이 떠 있었다. 강론 중에 졸고 있는 신자들을 본 신부는 초롱초롱 강론을 듣고 있던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할머니! 뭐하고 계세요! 졸고 있는 옆의 신자 깨우지 않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할머니는 “신부님이 재워놓고 나더러 깨우래”하며 푸념을 했단다. 강론이 신자들 마음 안에서 거리가 멀면 졸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번민에 쌓여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은 잠에 취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직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은 “수난 예고”를 세 차례나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만큼의 마음의 토양이 되어 있지 않았나 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날도 제자들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분이 떠나시고 성령님이 오시는 날, 제자들은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지방, 사마리아 지역과 이방지역 그리고 땅 끝까지 인간 정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복음의 증인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태어났다. 성령께서 오시는 날, 제자들은 예수님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예수님께로 모든 초점을 맞춘다. 제자들은 협조자 성령님이 오시자 드디어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이긴 승리자 예수님이 되셨음을 알게 되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세상에 안주하며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인간 정신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넘쳐났고 위험 중에도 세상을 향해 투신하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이곳저곳에서 잠을 청한다. 학생에게 소리친다. “야! 저놈 깨워!” 한 학생이 “선생님이 재웠으면서 나보고 깨우래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수업이 재미없어서일 테고, 어쩌면 지식교육을 받아들일 만큼 인간 정신의 발달이 늦어서일 수도 있다. 딱딱한 의자에서 힘들게 50분을 버티던 학생들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아휴, 답답해.”라며 문을 열고 나선다. 그 느낌이 교무실까지 이어져 와서 마음이 무겁다.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으면 저럴까 동정도 간다. 인간의 정신 안에 수업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학생들이 잠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잠에서 그들을 깨워 세울 만큼의 인간 바탕을 만드는 일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교사의 수업준비도 철저해야겠지만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동력은 진정으로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오늘 성령강림의 날, 제자들의 마음 안에 성령님이 오시어 그들의 정신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승리자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 가끔 신자 중에 성령님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후에 보면 선무당이 되어 있는 경우를 본다. 성령님은 인간 정신의 바탕을 보고 찾아오신다. 예수님의 생애는 아버지와 함께 한 생애이다. 우리 신앙인의 생애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애이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신 제자들은 그분처럼 세상에 당당히 서 있게 된다. 양업에 있는 3년의 시간은 학부모, 학생 모두에게 긴 피정의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은 모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양업을 떠나는 날, 비로소 부모도 학생들도 다 진리를 깨닫고 떠난다. 제자들이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전 생애에 담긴 진한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파견되는 것처럼, 부모도, 학생들도 세상을 향하여 새롭게 뛰어 들어간다. 사랑을 깨닫게 되는 날, 멋진 시작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