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847 | 작성일 : 2008년 4월 30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그래도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절망적일 때라도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갖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도전적이기에 어찌 보면 큰 축복이고 은혜를 입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십자가상의 죽음을 지켜 본 두 제자들은 그분께 대한 한 점의 희망도 없게 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들의 절망적인 어두움은 삶 전체를 원점으로 돌려 엠마오로 향하는 낙향을 선택한다. 그 분께 대한 희망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면 그랬겠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과 동행해 주시며 희망의 줄을 다시 놓아주신다. “무슨 이야기냐?” 하시며 다정하게 걸어가시며 말씀해주시고 그들과 함께 마주한 식탁에서 빵을 떼신다. 말씀은 뜨거운 감동으로 마음이 열리며, 식탁에서 빵을 뗄 때는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해주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또 다른 배려였고 희망이었다. 두 제자는 그 순간 낙향을 접고 그 분의 삶을 쫓아 복귀한다. 부활의 목격증인이 된 두 제자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이에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부활 체험이었다.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며, 뜨거운 감동을 갖게 해주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해주실 때 우리는 절망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신앙인들은 죽음의 긴 터널 속을 지나가듯 끝이 보이질 않을 때라도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들처럼 실망을 접고 예수님께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만일 하느님을 향한 도전없이 인간이 옛 삶으로 향해 복귀한다면 영원한 희망의 줄을 결정적으로 놓쳐버리게 된다. ‘신대륙을 발견’은 탐험가들이 자기 생각에서 탈출하였기에 볼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 베이컨의 “동굴의 우상론”처럼 우물 안에 개구리 신세가 되었다면, 진리의 세상은 더 이상 문이 닫혀버렸을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실망했을 때라도 희망을 주시는분이 게시기에 도전해야하며 하느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생명이 되어지도록 살아가야 한다.
  우리 2기 졸업생 중에 호주의 멜버른 의대에 다니는 학생이 있다. 세계 23위에 들어있는 명문교이며 더구나 의대하면 세상이 알아주는 대학이다. 그 학생은 과거의 자기 사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를 향해 그림을 그렸다. 몇 번이고 회귀하고 싶었겠지만 신앙인인 그는 하느님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배낭여행을 하며 더 높은 이상과 목표를 위해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겼을 것이다. 젊은이들 특히 미래를 향하지 않고 낙향해서는 안 된다. 자기 세상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경이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활은 우리들의 삶의 목표여야 한다. 인간 전체 그림의 목표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