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lity의 기준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567 | 작성일 : 2009년 4월 10일

Quality의 기준

 조화로운 질서로 모두가 행복해하는 삶, 거짓이 없고 신뢰가 구축된 진실한 삶, 정의와 사랑이 넘쳐나는 평화로운 삶, 이런 사회를 “기본이 바로 선 사회”라 한다. 이런 삶의 현장이 되도록 선의의 시민들은 힘껏 노력하며 ‘하느님 나라, 행복한 사회’를 꿈꾸며 살아간다.
 기본은 상식을 의미하고, 국민을 상식수준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의무교육이다. 교육법상의 우리나라 의무교육은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지만, 실질적으로는 고등학교까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까지 다양한 교과교육과 상식교육을 하고 있고, 이를 위해 국가는 저소득층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여 그들이 기본교육을 받도록 충분히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의무교육을 통해 기본이라는 최소한의 공통부분을 배워갈 때 사회는 행복하고 이상적 국가를 꿈꾸며 이를 실현할 수 있다.
 의무교육 기간은 분명 전문교육을 하는 시기가 아니다. 의무교육 시절은 모든 분야를 망라해서 상식수준을 배우는 기간이다. 그런데 의무교육과정에서 기본을 배워가는 여러 부분을 소홀히 하고, 몇 가지 실용과목만을 집중하여 교육하는 현실에서 실용성을 지니지 못하다고  여기는 교과를 누가 배우려 하겠는가. 의무교육 시기에 대학을 가기 위한 실용성 교육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은 10명 중 8,4명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이렇게 높은 학교교육을 받으면서도 부끄럽게 총체적으로 ‘기본이 바로선 교육’을 하자고 외치고 있으니, 의무교육에 중병이 걸린 것이 분명하다. 이는 의무교육마저도 기본교육 없이 편중적으로 실용적인 과목만 전념하고 있다는 단서가 된다. 영어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논리로 기본교과를 무시한 채, 학생에게 실용적인 지식만 먹이다가 병을 발견하게 되면, 이런 모습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기본이 서 있지 않다!”며 개탄한다. 국민들의 기본을 바로 세우려면 세상전체를 볼 수 있는 교사의 안목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실용적인 지식만을 먹이면서 총총걸음으로 효율성을 높이려 하다 보니 결코 기본이 바로 설 수 없다.
 ‘자연’은 하느님의 섭리대로 전체의 질서에 순응하며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데, 자연을 부리고 다스리며 정복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전체의 질서를 파악치 못하고 자기 부분만을  집착한다. 적어도 인간은 전체를 향한 목적 지향적 인간으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럴 때 국민은 행복한 사회를 꿈꿀 수 있고 이를 실현할 수가 있다.
 기본을 바로 세우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우리를 걱정하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내 행위가 내 욕구를 충족되는가? 둘째, 내 행위가 나에게 기분 좋은가? 셋째, 내 행위가 나에게 유용한가? 넷째, 내 행동이 파괴적인가? 다섯째, 내 행위가 상대방의 욕구도 충족시켜 주는가? 여섯째, 내 행위가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가? 일곱째, 내 행위가 하느님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는가? 등이라고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며 심리학자인 윌리엄 글라써(1925~) 박사가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좋은 학교(Quality School) ‘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결과, 기본을 충실하자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Quality의 기준’을 질풍노도처럼 예측하기 힘든 청소년들에게 대입해 보니, 본인이 무엇이 잘못인가를 빠르게 파악하고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좋은 학교’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체를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을 제시하는 학교이다. 기본도 안 되는 교사가 어찌 전체를 제시하며 각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울 수 있겠는가.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악순환일 것이다. 어른이 전체를 알 때 학생들은 기본의 필요함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