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 개교 3년 후 경험담을 꺼내보며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960 | 작성일 : 2010년 1월 15일

                          대안교육 개교 3년 후 경험담을 꺼내보며

 1998년 대안학교를 열면서 고위기군 부적응, 문제행동 유형인 자퇴생들이 몰려왔다. 이런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대안학교라고 인식했다. 그들은 부적응 행동이 다양하고 심각해서 학교는 교육도 상담과 장기 치료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신은 물론 남에게 해가 되는 행위로 넘쳐났다. 무단외출, 장기 결석은 학교를 혼란스럽게 했다. 문제행동은 상처가 깊어 치유도 어렵고 상담을 하여도 교육의 영역이 아니었다. 첫 입학생 40명 중 60%의 학생이 첫 학기에 학교를 포기했다.  교사는 ‘사랑’으로 함께하겠다는 수도자(수사, 수녀)들로 구성되었으나, 이런 학생들은 전혀 문외한이었다. 학교에는 전문 상담가 1명도 배치되지 않았다. 이것은 탁상의 표본이기도 했다. 
 학교는 구성원이 유기적으로 일치해도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데, 서로가 우왕좌왕  책임을 떠넘기려고 다틀 때도 많았다. 학교구성원은 일치를 이루지 못해 따로 국밥이었다고나 할까. 교사와 기숙사 사감도 서로 불협화음이었다. 학생이 상담을 바랄 때면 학교 밖으로 보내야 했다. 고위기군 학생들이라도 한 가지 문제행동에 모아졌다면 그런대로 견딜 만 했을 것이다. 고위기군의 다양한 문제유형을 한 곳에 모아놓아 문제로 꼬일 때면 학교는 대책이 없었다. 이렇게 3년을 지나면서 홍역을 치룬 결과는 고위기군은 학교 영역이 아님을 일게 된 것이다. 그 후 입학선발은 다면면접으로 교육의 대상만을 선발했다.
  학교 설립 시, 대안학교에 맞는 교육철학과 기본교육원리가 있었으나, 경험부족으로 학생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학생 지도방법도 영국의 섬머힐 방식으로 학생들의 행복을 위해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을 배제하고 방종을 하더라도 자유를 무한대로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들 문제행동이 심각할 때는 그를 잠재우려고 강력한 통제방식으로 바뀌기도 하고, 학생지도에 일관성이 없었다. 그로인해 학생들은 통제한다고 저항했고 학교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곤 했다. 학생들이 미숙해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거나 감정조절이 안될 때 교사도 극도의 피로로 여유가 없어 마찬가지였다고나 할까?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규칙을 만들었지만 그 규칙마저도 대수롭게 여겨 쉽게 어기거나 잘 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하여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학생들이었다. 이런 학생들은 교육적인 방법으로 문제행동에 대한 책임부여는 별 효과가 없었으며, 그 결과 규칙은 있으나 마나 별로 큰 효과가 없었다. 급당 인원이 20명이어서 교사 1인당 10명을 담당하지만 고위기군 학생이었기에 담임의 얼굴에는 노랗 꽃이 피었다. 교사 수 1인 당 학생 수는 더욱 작아져야 했었다. 
 고위기군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정에서 교과의 교육은 싫어하기에 교과의 교육과정 20%정도로 하면 좋았다. 시간에 감에 따라 육체적 활동에서 정신적인 활동으로, 차츰 인성교과의 교육과정에서 교과의 교육과정으로 시수를 늘여가야만 했다.
  학생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학부모 교육이다. 학생들의 보호자, 양육자, 지지자인 학부모들 때문에 자녀들이 문제행동을 심화시키는 것을 보았다. 학부모가 변해야 자녀가 변했다. 개교 후 3년 동안 많은 것을 경험했고 고위기군 학생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론은 삶 속에서 살아 생명을 되어갔다. 고통은 컸지만 고통만큼이나 행복한 결실을 얻은 소중한 3년으로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