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학부모가 되자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336 | 작성일 : 2012년 3월 1일

넉넉한 학부모가 되자

 자녀는 학부모의 축소판이다. 자녀는 모든 면에서 부모를 닮았다. 부모는 어린이집에 자녀를 맡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자녀는 부모의 품 밖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녀의 내면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점차적으로 적어진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을 하면, 점점 더 부모와 자녀 간의 시간이 줄어들어, 부모는 자녀의 내면 성장을 놓쳐버린다. 바로 여기에 자녀문제의 원인이 된다. 부모에게서 멀어진 자녀는 또래들과 어울리기 시작하고 가끔 말썽을 일으키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의 점진적인 부정적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내기도 한다.
 요즘 중학교 2학년이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목표도 없고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도 전혀 없을 때이다. 사춘기를 지나며 자녀의 문제가 제법 심각해진 경우, 학교에서 부모를 소환하고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라도 하면, 부모는 예상 밖이라며 지금의 학교가 잘못 지도해서 그렇다며 항변한다. 이럴 때 부모가 서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녀교육의 자기 역할과 책임을 다했으면 한다. 부모의 관심과 배려가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내 탓이요!’하며 학교와 호흡을 맞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일부 부모는 자칭 똑똑해서 자신의 책임을 학교에 전가하며 폭풍전야를 만들곤 한다.
 이들 대부분은 입학 면접 때 우리 자녀는 전혀 문제가 없다며 거짓말 했던 부모들이다. 입학 후 저학년 때는 선배들의 지시를 따르고, 양아치 짓을 동료들에게 해 댄다. 그런 후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될 즈음하여 후배들을 괴롭히고 약자들을 왕따 시키곤 한다. 학교가 그 학생에게 봉사를 명하면, 부모는 기숙사비 못 내겠다고 말한다, 이미 낸 기숙사비 돌려 달라면서 부모도 자녀와 꼭 같은 변명과 항변을 한다. 왜 그러는가. 학교에 대한 엄포도 아니고 비겁하기까지 하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학교가 자녀를 무관심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학생을 보면 그 집의 부모 태도가 어떠한지 감지 할 수가 있다. 학생이 교사들을 볼 때마다 피하고 눈칫밥을 먹는 듯한 느낌을 보여주면 알 수가 있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떳떳치 못할 때면 우리도 그 학생을 만날 때면 솔직히 부자연스러웠다. 이런 부모와 자녀의 공통점은 3년 동안 부모는 학교에 일관되게 무관심하다는 것과 자녀는 좋은 방향으로의 발전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꼬이면 풀어야 한다. 꼬인 대로 졸업하면 그 어려움은 계속 된다. 서로 대면해서 화해하고 진실을 알 때까지 생산적인 싸움을 벌여야 한다. 새 학기가 또 시작된다. 이번엔 또 어떤 학부모를 만나려는지 궁금해진다.
 매사에 넉넉한 부모는 보는 이도 행복하다. 넉넉한 부모는 언제나 기다려 줄줄 알고 대화하며, 내가 바라는 대로 남의 자녀를 생각하고 사랑한다. 그들은 언제나 일관되게 마음이 순수했고, 이해타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부모의 자녀들은 앞날이 잘 풀렸고, 나는 오래오래 기억하며 축복을 빌어준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좋은 관계로 시작과 끝이 똑 같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다면, 부족했다며 솔직하고 자기 가슴을 친다면, 학교는 빠르게 그 자녀 문제에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며 협조를 할 것이다. 자녀가 일으키는 문제 때문에도 학교가 어렵지만, 무지한 부모로 말미암아 학교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으면 한다. 부모의 부정적 태도는 자녀를 변화시키기에는 큰 장애요, 걸림돌임을 알아야 한다. 자녀를 맹목적으로 감싸려하지 말고, 오늘의 자녀를 정확히 알려고 해야 한다. 고교 3년 동안에 학부모 회의가 있던 날이면 부모 중 하나라도 꼭 출석했던 부모야말로 자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며 그로 인해 자녀도 부모도 훌륭해 졌다. 입학 면접 때 한 약속, “네 하겠습니다. 지키겠습니다.” 이 약속을 성실히 지켜야 한다. 이것은 학교의 강요도 명령도 아니다. 공동체 속에 나와 자녀, 학교가 더불어 서로 생명이 되자는 일이며 축복받는 길이다.